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이 15세 (문단 편집) === 어린 왕 === 루이 15세가 즉위하던 시점은 부르봉 왕가에 비극이 넘쳐날 때였다. [[태자|왕태자]]인 할아버지 [[그랑 도팽 루이]], 왕태손인 아버지 [[프티 도팽 루이]]와 태손빈인 어머니 사보이아의 마리아 아델라이데가 모두 [[천연두]]로 연달아 사망했으며, 1712년에는 그 형인 브르타뉴 공작 루이와 루이 15세마저도 천연두에 감염되어 사경을 헤맸다. 이때 형 브르타뉴 공작이 과도한 사혈치료[* 중세 의학이론에서는 신체에 4가지 체액(피, 점액, 흑담즙, 황담즙)이 존재하고, 질병은 이 체액의 균형이 깨져 생기는 것으로 보았다. 때문에 환자의 피를 뽑는 것으로 신체 균형을 회복해 병을 치료한다는 사혈치료가 많이 이루어졌는데, 문제는 이게 한 두 방울 뽑는 수준이 아니라 '''몇 리터씩''' 뽑아내는 게 다반사였다는 것이다. 이러니 [[과다출혈]]로 죽은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로 죽자 이 형제의 [[가정교사]]였던 방타두르 공작부인은 루이 15세가 있던 방문을 걸어 잠그고 사혈치료를 강력하게 반대해 그의 목숨을 구했다. [[증조부]] 루이 14세가 1715년 9월 1일에 사망하자, 당시 앙주(Anjou) 공작이었던 루이 15세는 5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이런 상황을 예견했던 루이 14세는 촌수가 가까운 남성 왕족이자[* 루이 15세의 숙부인 스페인 왕 [[펠리페 5세]]가 있었으나 펠리페 5세는 너무 멀리 있었으며,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상실했다.] 루이 15세의 재종조부(할아버지의 사촌)이며, 대고모부인 [[필리프 2세(오를레앙)|오를레앙 공 필리프 2세]][* 루이 14세의 친동생 [[필리프 1세(오를레앙)|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의 아들로 루이 14세의 조카였다. 훗날 [[프랑스 혁명]]기에 활동했던 [[루이필리프 조제프 도를레앙|오를레앙 공작 루이필리프 2세]]의 증조부였으며, 프랑스의 마지막 국왕 [[루이필리프]]의 고조부였다.]가 [[섭정]]을 맡을 것을 비밀리에 유언으로 남겼다. 또한 필리프 2세가 권력을 독점하고 자신의 증손자를 폐위할 것을 우려해서였는지, 적통으로 인정한 두 서자, 멘 공작 루이 오귀스트와 툴루즈 백작 루이 알렉상드르가 함께 어린 국왕을 보필하라고도 유언했는데 이는 어머니나 삼촌을 포함해 가까운 친척들이 천연두로 인해 대부분 요절했기 때문이었다. 오를레앙 공이 유언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선언해 고등법원은 이를 1차적으로 무효화시키고, 친국 후 오를레앙에게 [[섭정]][* 섭정은 부르봉 왕가의 역사에서 총 세 번 이루어졌는데 1610년 마리 드 메디시스의 루이 13세에 대한 섭정, 안 도트리슈의 루이 14세에 대한 섭정과 1715년 오를레앙 공의 섭정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중 마지막 섭정이 가장 큰 논란을 일으켰던 것이, 국왕의 어머니였던 전대 섭정들과는 달리 섭정자가 야심 많은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섭정 기간 동안 왕이 죽으면 남성 섭정자는 왕이 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후보였다.]을 전임한다는 안을 통과시켰다. 고등법원은 이런 협조의 대가로 '건의권'[* remontrance, 왕의 [[칙령]]에 '베토'(반대, veto)를 던질 수 있는 권리]을 인정받았다. 게으르지만 영리하고, 교양있으며, 야망도 크지만 방탕한 오를레앙 공은 권력을 독점하다시피 했고, 근처 왕궁에 자리잡아 루이 15세를 감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